제3장 새 언약의 일꾼 고석남 목사 고린도후서 강해

 제3장 새 언약의 일꾼 고석남 목사 고린도후서 강해


■ 본문 분해


1.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다(1-11)

2.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12-18)


■ 본문 강해


1.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편지이다(1-11)


[3:1]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거짓 사도들이 오히려 사도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비방하였다. 

그들은 사람의 추천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들이 참 사도인 것처럼 교인들을 미혹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사도임을 스스로 천거(자천)하거나 거짓 사도들처럼 추천서를 고린도 교회에 부치거나 그들에게서 받거나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도이고 사도로 일한 결과(열매)가 바로 고린도 교회이기 때문이다. 


[3:2] 2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이다. 

사람들이 편지를 보면 그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 교회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를 볼 때 바울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교회를 보면 그 목사를 알 수 있고 목사를 보면 그 교회를 알 수 있다. 


“우리 마음에 썼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볼 때 그리스도께서 바울과 함께 하신 열매라고 마음에 확신하고 기뻐한다는 의미이다. 


[3:3]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


“그리스도의 편지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이면서 또한 그리스도의 편지이다. 

편지를 쓴 사람(복음을 전한 사람)은 바울이고, 편지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알게 하는 진리이다. 

고린도 교회를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종이에 쓴 편지는 먹으로 쓰지만, 그리스도의 편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마음에 쓴 것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에 성도가 구원받은 성도답게 거룩한 행실을 하여야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구원받은 성도가 만일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저러한가?”라고 그리스도께 욕이 돌아간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성령께서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어지게 하였고(고전 12:3), 또 그들의 마음에 성령이 계신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전 3:16; 고후 13:5).


[3:4-5]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 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편지요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확신이 있으나 바울 자신의 능력으로 이루진 일처럼 생각하거나 스스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3:6] 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만족하게 하셨다(ἱκανόω,히카노오)’는 ‘할 수 있게 하다’, ‘자격을 갖추다’, ‘충족시키다’의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사도의 직분과 함께 성령을 주셨고 복음의 계시를 주셔서 새 언약의 일꾼이 되게 하셨으며 그 직분을 감당하게 하셨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조문(γράμμα,그람마)’은 ‘문자, 문서’를 의미한다. 

좁은 의미의 율법 조문은 의식적인 율법을 말한다. 

짐승으로 제사를 하거나 아론의 자손만 제사장이 된다거나 부정하게 되는 것과 정결하게 하는 의식 등을 정한 율법 등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율법을 말한다. 

구원의 관점에서 복음과 대조하여 말할 때는 율법을 율법 조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영으로 함이니”

새 언약(복음)의 일꾼은 복음을 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복음을 믿는 자들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 영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진리를 깨달아 믿도록 하는 직분이다.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사람이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율법이 그 사람을 정죄하며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 조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로마서 3:20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성령께서 죄인으로 하여금 복음이 믿어지게 하시고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성령은 죽었던 영을 살려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며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그러므로 영(성령)은 살리는 것이다.


[3:7-8]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율법의 중심 계명인 십계명을 돌에 써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고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으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직분은 죽게 하는 직분이다.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돌에 십계명을 새겨서 주셨다. 

그처럼 율법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전하고 가르치는 모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고, 그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나타나 얼굴에 광채가 났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두려워하며 감히 그의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다(출 34:30). 

그렇다면 하물며 성령으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는 직분이다.


[3:9]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정죄의 직분”

율법의 직분은 정죄의 직분이다.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그 율법이 그 사람을 정죄하기 때문이다(롬 3:20, 5:13참조). 

그러나 율법을 전하는 모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다.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직분은 의의 직분이다. 죄인들이 복음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직분은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3:10]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영광되었던 것’은 율법을 전하는 모세의 직분이다. 

‘더 큰 영광’은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직분의 영광이다. 

율법을 전하는 모세의 직분도 영광이 있었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직분의 영광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3:11-12]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없어질 것’은 율법의 직분이다. 

율법의 직분은 복음이 올 때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없어질 율법의 직분도 영광으로 말미암은 직분이라면 길이 있을 복음의 직분은 더욱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바울은 이러한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한다. 


2.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다(12-18)


[3:13]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있었다. 

이것은 율법의 직분이 영광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모세는 그 영광의 광채가 일시적인 것이며, 곧 사라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율법의 영광은 복음의 영광이 올 때에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모세가 백성을 가르치고 난 후에는 곧 수건을 그 얼굴에 써서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장차 없어질 영광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알면 그들이 율법을 소홀히 하여 지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모세가 수건을 자기 얼굴 위에 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소중히 여겨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의 영광이 사라졌고, 영원하고 더 큰 복음의 영광이 왔으므로 그 복음의 영광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일군이 되었다.


[3:14] 14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러나 유대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여 율법이 영원한 것처럼 착각하고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으려고 복음을 믿지 않았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모세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가린 수건이 없어지면 율법의 영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율법의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다. 


[3:15-16]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오늘까지 유대인들이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고 있어서 율법의 영광이 사라진 것을 알지 못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져서 율법의 영광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3:17]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그리스도는 영이시니 그리스도의 영이 계신 곳에는 진리를 깨닫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복음을 믿는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영(성령)이 계셔서 율법의 정죄와 사망에서 해방된 자유가 있다. 


[3:18]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복음을 믿는 성도는 이미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므로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님의 영광이 자기에게 있는 것을 본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영광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변화하여(μεταμορφόω,메타몰포오)’는,

‘변화한다’, ‘닮는다’는 의미이다. 

복음을 믿는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러므로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점점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이것이 구원받은 영광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가 그리스도 밖에서 살면 불신자처럼 죄를 범하기 때문에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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