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제1장 사랑받는 가이오 고석남 목사 요한삼서 강해
제1장 사랑받는 가이오 고석남 목사 요한삼서 강해
■ 본문 분해
1. 문안 인사(1-2).
2. 가이오에 대한 칭찬(3-8).
3. 디오드레베에 대한 책망(9-10).
4. 악한 것을 본 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 받으라(11-12).
5. 결론(13-15).
■ 본문 강해
1. 문안 인사(1-2)
[1:1] 1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요한삼서는 요한이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장로는 사도 요한이다(요이 1:1).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가이오 곧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한다”라고 기록하였다.
요한삼서에는 특별히 사랑의 실천이 강조되었다.
불과 15절까지 짧은 글이지만 ‘사랑’이라는 말이 6번이나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요일 4:8, 16),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아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사도 요한이 가이오를 참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것은 그가 모든 성도를 사랑하지만 특별히 가이오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가 이처럼 가이오를 사랑한 것은 가이오가 믿음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부모가 모든 자식을 사랑하지만 부모의 말을 잘 순종하고 자기 책임을 잘하는 자식에게 사랑이 더 나가는 것과 같다.
그러한 사랑은 결코 편애가 아니며 정당한 것이다.
[1:2] 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어떤 사람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여 성도가 믿음을 잘 지키면 반드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육신도 건강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믿음을 잘 지키지 못한 것인가?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말구유에 태어나셨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셨으니 육신으로는 잘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믿음이 좋은 다니엘도 사자 굴에 들어갔으며, 요셉도 특별한 죄가 없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에 팔려 가서 종살이 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믿음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 복을 받아 앞에 말한 세 가지가 다 잘 되는 수도 있으나 이 세 가지가 다 잘되지 않았다고 그 사람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도 요한이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고 말한 것은 오히려 가이오의 영혼은 잘 되었으나 아직 범사가 잘 된 것이 아니며 강건하지 않기 때문에 사도 요한이 그것들을 간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영혼이 잘 되었다는 것은 그의 신앙 인격이 거룩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격이 먼저 거룩하게 된 후에 범사가 잘되고 육신도 강건하게 되는 복을 받는 것이 좋다.
인격이 바르지 못하고 범사가 잘되면 교만하기 쉽고 나태하기 쉽다.
또 인격이 거룩한 사람은 육신이 강건하면 믿는 일을 잘하지만 인격이 거룩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건하면 방탕하기 쉽다.
영혼이 잘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시면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하셨습니다.
2. 가이오에 대한 칭찬(3-8)
[1:3] 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진리가 무엇인가?
①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② 성령이 진리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라고 말씀하셨다.
③ 하나님이 진리이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시 31:5)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진리이시다.
④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셨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가이오의 영혼이 잘 된 이유는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하였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행할 때 거룩한 인격으로 변화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진리를 잘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행동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종들이 기뻐한다.
진리를 바르게 깨닫고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은 그 인격이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러므로 인격이 변화되지 않고 행위가 바르지 않으면 진리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1:4] 4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진리 안에서 행하면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하도록 덕을 세우며 자신의 인격도 거룩하게 변화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종(목사)들은 교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볼 때 목회의 보람을 느끼며 기뻐한다.
이것은 마치 자녀들이 부모의 말을 잘 순종할 때 부모가 가장 기뻐하는 것과 같다.
[1:5] 5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무엇이나 신실하게 행한다고 사도 요한이 칭찬하였다.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나그네는 보통 나그네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나그네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도 시대에는 복음의 일꾼들이 한 교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복음 전도의 사명감에 불타 나그네처럼 떠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들을 잘 영접하여 대접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며 복음 전도에 협력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
[1:6-7] 6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7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나그네 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교회 앞에서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하였다.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그들을 전송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나그네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가이오는 그들을 잘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떠날 때는 여비를 주며 친절하게 전송한 것이 분명하다.
가이오가 전도자들에게 사랑을 베푼 일에 대하여 전도자들이 교회에 돌아가 증언하였다.
가이오는 이처럼 진리 안에서 행하고(3-4), 사랑 가운데서 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잘된 것이다.
[1:8] 8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
성도는 복음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영접하여 잘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우리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영접하고 잘 도와주면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된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속죄 제물로 희생하셨다.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고난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하게 된다.
또 복음을 전하는 일꾼들을 사랑하며 잘 대접한다.
3. 디오드레베에 대한 책망(9-10)
[1:9-10] 9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10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사도 요한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다”라고 말하였다.
이 편지는 요한삼서 이전에 쓴 편지를 말하며 사도 요한이 파송한 전도자들을 잘 영접하도록 부탁한 내용인 것 같다.
그러나 디오드레베 일당이 사도 요한의 권면을 거부한 것 같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디오드레베는 어떤 인물인가?
① 으뜸 되기를 좋아하였다.
사도 요한의 부탁을 거절한 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있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는 교만한 자이다.
그러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라고 하였다.
디오드레베는 아마 한 교회의 지도자였을 것이다.
그가 으뜸 되기를 좋아하므로 교회에서 사도 요한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하여 사도 요한이 부탁한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② 복음의 일꾼들을 영접하지 않았다.
교만한 자는 자기가 대접받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지 않는다.
디오드레베가 요한 사도가 파송한 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교회에서 내쫓았다.
③ 복음의 일꾼들을 악한 말로 비방하였다.
교회 안에서 교만한 자는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자기가 독점하려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악한 말로 비방한다.
디오드레베는 그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11] 11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사도 요한이 사랑하는 자 가이오에게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아라.”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항상 선택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선한 것을 선택하여 선한 것을 본받을 수도 있고, 악한 것을 선택하여 악한 것을 본받을 수도 있다.
하나님(성령)은 성도에게 선을 선택하여 행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는 성도가 선을 선택하는 것보다 악을 선택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더 유익한 것처럼 속이며 미혹한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성령)은 성도에게 선한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또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함께 하시므로 고난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여 복을 받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마귀는 성도에게 욕심과 교만한 생각을 넣어주어 선한 양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미혹한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여 하나님을 뵙지 못한 자이다.
[1:12] 12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
요한삼서에 기록된 세 사람이 있다.
첫째,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다.
둘째,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여 하나님의 종들을 망령되이 비방하였고, 복음의 일꾼들을 대접하지 않았으며 대접하는 자에게 대접하지 못하게 하고, 교회에서 내쫓는 악한 일을 하였다.
셋째,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은 사람이었다.
성도가 믿음을 잘 지키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교회의 지도자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라고 말씀하였다.
5. 결론(13-15)
[1:13-14] 13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14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쓸 것이 많지만 붓으로 쓰는 것보다 속히 가서 보기를 원하였다.
사도 요한은 속히 가서 서로 대면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려고 간절히 소원하였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좋으나 그 보다 전화로 대화하는 것이 더 좋고, 전화로 대화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 얼굴을 보고 교제하는 것이 더욱 좋다.
[1:15] 15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이 평강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이다.
아무리 환난과 핍박이 많아도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평강이 없고 걱정 근심이 많고 불안하면 신앙이 바로 되지 못한 증거이다.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사도 요한이 가이오에게 여러 친구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안하는 것이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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